메인 영역
신앙이 아름다웠던 순간들,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2025년 8월 12일,
우리 곁에 늘 함께 해 온 기독교의 이야기가
여러분 앞에 펼쳐집니다.
갤러리
-
안종수의 글씨와 조선의 마케도니아인 이수정
갤러리淸明在躬志氣如神(청명재궁지기여신), 즉 ‘맑고 밝음이 몸에 깃들면, 뜻과 기운이 신령해진다’라는 말입니다. 아마도 츠다센의 인품에 대한 존경의 뜻을 담아 선물한 것으로 보입니다. 저도 순식간에 조선인 두 명을 감화시켰던 츠다센의 맑고 밝은 인품을 느껴보고 싶습니다. 맨 왼쪽에는 조선(朝鮮) 안종수(安宗洙)라는 서명도 보실 수 있습니다. (본문 중) 조선의 마케도니아인 이수정 사도행전에는 사도 바울이 환상 중에 마케도니아인을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행 16:9). 바울이 “건너와서 우릴 도우라”라는 그 마케도니아인의 말을 듣고 아시아로 가려던 계획을 바꿔 유럽을 향하죠. 가끔 그때 바울이 아시아가 아닌 유럽으로 간 것을 아쉬워하는 분을 보게 되는데요. 심지어 아시아에 교회가 들어오는 게 엄청 늦어진 이유라고 통탄하시는 분도 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가려고 했던 아시아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아시아가 아니라 오늘날 튀르키예 서부 지역이니까 너무 아쉬워하지는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성서에 에베소,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같은 교회들이 나오잖아요? 그곳이 바로 성경이 말한 아시아입니다. 아무튼, 조선의 마케도니아인이라는 별명이 붙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수정입니다. 이름이 맑고 예쁘지만 남자입니다. 이수정은 1882년 9월부터 1886년 5월까지 일본에 머물렀는데요. 이때 기독교인이 됩니다. 1883년 5월 발표된 이수정의 신앙고백은 조선인 최초의 것으로 역사적 의미가 깊은데요, ‘뼛속까지 유교를 익혔던 조선인이 기독교를 믿으면 주자학적 신앙고백을 하게 되는구나’라는 점을 볼 수 있습니다. 혹시 관심이 생긴다면 배요한의 논문, “이수정의 신앙고백문에 대한 유교철학적 분석”을 한번 보시길 바랍니다. 기독교인이 된 이수정은 성서를 번역합니다. 1884년 『현토한한신약전서』(懸吐漢韓新約全書)를 간행했고요, 1885년에는 국한문 혼용체로 『신약마가젼복음셔언해』를 번역했습니다. ‘현토 성서가 뭐야’ 싶으시죠? 한역 성서에 음독 구결 기호를 붙인 겁니다. 한문에 토를 달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우리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에 영인본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1885년 언더우드나 아펜젤러 같은 선교사들이 내한할 때 일본을 경유하며 이수정이 번역한 『신약마가젼복음셔언해』를 들고 들어왔죠. 이수정은 1883년 12월 미국 교회에 한국 선교를 청원하는 편지를 보낸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이 편지가 미국의 선교 잡지 The Missionary Review에 게재되면서 한국 선교의 개시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수정이 조선의 마케도니아인이라고 불리는 것이죠. 편지 내용의 일부를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인 나 이수정은 미국의 형제자매에게 인사드립니다. … 복음전파의 시대에 내 조국은 아직 기독교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 세상의 귀퉁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에 나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성서를 한국어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일의 성공을 위해 밤낮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거의 끝나가고 있습니다. … 여러분의 나라는 기독교 국가로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여러분이 우리에게 복음을 보내지 않는다면 다른 나라가 선교사를 보낼까 염려됩니다. … 여러분들이 제 말을 경청하고, 제 요청을 허락한다면 더없이 기쁠 것입니다." ‘다른 나라가 선교사 보내기 전에 빨리 보내라.’ 과연 미국인의 프론티어 정신을 흔들어 놓을 만한 호소입니다. 이수정과 안종수 그런데 이수정은 왜, 어떻게 일본에 가게 되었을까요. 기존에는 1882년 임오군란 때 이수정이 명성왕후의 피신을 도와 공을 쌓았고 그 덕에 기회를 얻어 수신사 박영효의 비공식 수행원으로 일본을 방문했다고 이야기해 왔습니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에서는 조선의 기록에 이수정이 공훈을 쌓았다는 증거가 없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기존의 설이 사실인지 더 따져봐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기존의 이야기는 일본의 자료들에 기초한 것이었거든요. 어떻게 일본에 가게 되었는지는 연구가 진행되는 것을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튼 수신사의 일행으로 일본에 가게 된 것은 맞습니다. 아마 민영익의 겸인(양반가나 부호의 집안일과 사무를 맡아보던 사람-편집자)으로 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수정이 어떻게 수신사 일행과 함께 일본에 갈 수 있었는지도 새롭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수정이 일본에서 큰 관심을 보인 분야 중 하나는 근대 농학이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안종수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은 나주부 참서관 등을 역임한 관리이면서 동시에 농학자인데, 앞서 1881년 신사유람단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갑니다. 농학자니까 일본에 저명한 농학자를 만나고 싶었겠죠? 그래서 만난 것이 츠다센(津田仙)입니다. 이 만남은 꽤 성과가 좋았습니다. 일본에서 츠다센을 만나고 농서를 구입해 온 안종수가 1885년 서양의 근대농법을 한국에 처음 소개한 『농정신편』(農政新編)을 간행하거든요. 그런데 안종수와 츠다센의 만남은 한국의 농업사뿐 아니라 기독교사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당시 일본의 기독교계 잡지인 「칠일잡보」(七一雜報)는 그 만남의 마지막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츠다센이] 마태복음 5장을 쓴 족자를 보여주며, ‘옛날 [조선이 일본에] 논어를 선사한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는데, 논어의 등불보다 훨씬 더 밝은 햇빛으로 보답하겠습니다’라고 하면서 그 족자를 드릴 뜻을 표시하였다. 이에 손님[안종수]이 이 글을 읽어보고 감개무량하여 한없이 기뻐하였다. 츠다센이 이 족자를 말아서 선물로 드리려 한 즉, 손님이 사양하며 이르기를, ‘진실로 예수교는 덕이 있는 종교라는 것을 깨달았으니 귀국하면 국왕에게 반드시 종교의 자유를 청원할 결심입니다. 그러나 이번만은 내가 출국할 때 예수교는 가지고 오지 않기를 서약하고 나왔으니, 잠시 선생의 집에 그대로 두시면 후일에 가지러 올 기회가 있을 줄 확실하니 그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하고 부탁하였다." 그러니까 츠다센을 만난 안종수가 그의 인품과 기독교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마태복음 족자를 나중에 가지러 오겠다고 했다는 내용입니다. 좀 과장 된 것 같기는 합니다. 안종수가 조선에 와서 종교의 자유와 관련된 어떤 활동을 한 바는 안 보이거든요. 아무튼 이후 안종수는 한국에 돌아와 역시 농업에 관심이 많은 친구, 이수정에게 츠다센 이야기를 합니다. 아마 굉장한 농학자이자 선비라고 소개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친구의 이야기를 들은 이수정 역시 근대 농학을 배우기 위해 츠다센을 꼭 한번 만나야겠다고 생각하고 수신사 일행으로 일본을 방문한 기회에 그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기독교를 접하고 결국 성서 번역자가 되고 조선의 마케도니아인이 되는 것입니다. ‘친구 족자 찾으러 갔다가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러면 이야기가 더 드라마틱해지겠지만, 너무 스토리 욕심은 내지 않으려고 합니다. 안종수의 글씨 오늘 소개해 드리는 문화유산은 안종수가 츠다센을 만났을 때 그 자리에서 써 주었다는 글씨입니다. 츠다센의 후손이 서정민 메이지가쿠인대학 명예교수에게 주신 것을 교수님이 우리 기관에 영구 임대해 주셨습니다. 위 인용문에 보시면, 츠다센이 옛날 조선이 일본에 논어를 선물해 준 것을 고마워하면서 안종수에게 마태복음 족자를 주려고 했다고 나오는데요. 이 글씨의 내용은 『예기』 「공자한거」의 구절을 변용한 표현입니다. 淸明在躬志氣如神(청명재궁지기여신), 즉 ‘맑고 밝음이 몸에 깃들면, 뜻과 기운이 신령해진다’라는 말입니다. 아마도 츠다센의 인품에 대한 존경의 뜻을 담아 선물한 것으로 보입니다. 저도 순식간에 조선인 두 명을 감화시켰던 츠다센의 맑고 밝은 인품을 느껴보고 싶습니다. 맨 왼쪽에는 조선(朝鮮) 안종수(安宗洙)라는 서명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이 글씨는 우리 문화관에서 이번에 새롭게 만든 “이달의 이야기” 코너에 전시되고 있습니다. 코너 이름으로 아실 수 있겠지만 조만간 다시 수장고로 들어가게 될 예정입니다. 실물을 보시고 싶은 분은 늦어도 10월 말까지 방문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 글은 (사)기독교윤리실천운동의 <좋은나무>에 게시된 글을 전재한 것입니다. 전재 글 바로가기 ☞안종수의 글씨와 조선의 마케도니아인 이수정
-
『가나안으로 가는 길』과 가나안 농군학교 주소록(2)
갤러리혹시 가나안 농군학교에서 새마을 운동 교육을 한 것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분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가나안 농군학교는 새마을 운동의 모태로 이미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새마을 운동은 1970년 시작된 범국민적인 지역 사회 개발 운동인데, 이 운동의 정신적인 모델이 바로 가나안 농군학교의 의식 개혁 교육이었습니다. 1962년 가나안 농군학교를 방문했던 박정희 대통령이 의식의 변화, 근면, 자조, 자립, 그리고 빈곤의 퇴치를 추구하는 가나안 농군학교의 교육 방향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이것이 새마을 운동이라는 국가사업으로 발전한 것입니다.(본문 중) 5번의 이상촌 개척 김용기 장로님은 총 다섯 번 이상촌을 개척하십니다. 지난 글에서 그 시작을 말씀드린 봉안에서의 이상촌 건설(1931-1945)이 첫 번째고요. 두 번째는 삼각산 농장(1946-1950), 세 번째는 용인 에덴향(1952-1954), 네 번째 하남 가나안 농장(1954-2014), 다섯 번째는 원주 신림동산(1973-)입니다. 유명한 가나안 농군학교는 1962년 가나안농장 안에 제1 가나안 농군학교가 설립되었고, 1973년 신림동산에 제2 가나안 농군학교가 설립되었습니다. 그럼, 이상촌에서는 무엇을 했을까요? 시대에 따라 내용이 조금씩 변하지만 첫 번째 이상촌인 봉안을 살펴보겠습니다. 봉안의 주택은 검소하면서 실용적으로 지었고, 의복도 사치를 금했습니다. 일하기 편한 작업복을 입었다고 합니다. 주식은 쌀보다는 잡곡과 고구마 등을 먹게 했는데, 부족한 영양은 집집마다 염소를 키워서 염소젖으로 보충했습니다. 그리고 농기구는 마을의 공동 비품으로 사용했습니다. 모든 가정에서 의무적으로 가축을 키우고 과수원의 나무들 사이에는 고구마를 심어서 땅을 놀리는 일이 없게 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일상의 생활이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공동체 유지를 위한 여러 시스템을 구축했습니다. 상부상조를 위한 협동조합, 소비조합, 공제상호조합 등이 운영되었는데, 소비조합에는 모든 가구가 의무적으로 가입한 다음 생필품을 공동 구매해서 최대한 저렴하게 물건을 살 수 있게 했다고 합니다. 공동체의 결속과 사상적 연대감을 위해서 유치원에서부터 신앙 교육을 하여 하나님, 이웃, 그리고 흙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도록 하였습니다. 이는 덴마크의 그룬트비가 강조한 삼애 정신입니다. 이상촌의 추구 방향은 이상촌만이 아니라 인근 마을의 이웃들도 함께 잘 살고 발전하도록 도우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온몸이 간인 개척자 그런데 이런 개척자로서 살아가다 보니 아무래도 정부와의 협력이 필요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때로는 부딪히는 것도 피할 수 없었죠. 이럴 때 많은 개척자들이 자신이 추구하는 사업이나 운동을 유지 혹은 발전시키기 위해 정부와의 충돌을 피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김용기 장로님은 충돌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삼국지에 조자룡이 유비의 아들인 아두를 품에 안고 혼자서 조조군 진영을 돌파하는 모습을 보고 조조가 “저놈은 온몸이 간덩어리구나”라고 담력을 칭찬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김용기 장로님도 온몸이 간인 부류에 속하는 분입니다. 일제 말기로 가면서 민족의식이 강했던 김용기 장로님과 일제 당국의 충돌은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아무래도 가장 심각한 부분은 신사 참배를 비롯한 일본 신도식 종교 행위를 강요하는 것이었습니다. 김용기 장로님의 회고록을 한번 보시죠. “(엔도 정무총감이) 내게 말하기를 한 가지 소원만 말하면 들어주겠다는 것이었다. 정무총감의 말에 나는 서슴지 않고 그에게 요구했다. ‘신사 참배와 동방 요배를 내게 강요하지 말아 주십시오!’ 나의 이 당돌한 요청에 엔도는 빙그레 웃기만 했다. 그렇게 미소 짓고 있던 엔도가 일순간 웃음을 싹 거두더니 내게 불쑥 한마디 했다. ‘굳이 못 하겠다는 이유는?’ … 당신들은 동방 요배를 강요하지만 알고 보면 천왕께 욕을 하라고 지시하는 거나 다름이 없습니다. 조선 사람치고 어느 누가 동방 요배를 하며 욕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 이렇게 말하자 엔도는 껄껄 한바탕 웃더니 수행원을 불러 다음과 같이 명령하는 것이었다. ‘김 장로가 하는 일에 간섭하지 말도록 하라!’ 엔도의 이 명령 한마디로 한때나마 나는 숨을 다소 쉴 수가 있었다.” 정무총감은 조선 총독을 보좌하면서 각 부처의 사무를 감독하는 자입니다. 조선총독부의 이인자라고 할 수 있죠. 그런 사람 앞에서 “나 동방 요배 안 한다. 나 신사 참배 안 한다”라고 대놓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학도병으로 끌려가기 싫었던 청년을 숨겨주거나, 교회 종을 바치라는 명령에 끝까지 저항하며 마을의 놋그릇과 수저를 협상 용품으로 삼아 교회 종을 가져가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아내기도 했습니다. 제가 앞에서 주식을 쌀이 아니라 잡곡과 고구마로 삼았다고 말했는데, 이것도 일제의 쌀 공출을 피하기 위해 아예 논농사를 줄이고 옥수수, 고구마, 밀을 재배한 것과 무관하지 않았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가나안 농군학교에 온 박정희 대통령이 식사 자리에서 빵을 먹으려고 하자 장로님이 ‘여기선 기도 먼저 하고 밥을 먹는다’라며 식사를 제지하고 식사 기도를 했다는 일화가 아주 유명합니다. ‘네가 밖에서 어떤 사람이든지 여기서는 내 방식에 따라라.’ 물론 할 수도 있는 말이지만, 그 상대가 2년 전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서 정권을 잡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라면 어떨까요. 정말 온몸이 간덩어리였던 분입니다. 가나안 농군학교와 새마을 운동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오늘 보여드리는 유물은 가나안 농군학교의 주소록입니다. 우리 문화관이 골동품상(?)에게서 구입하였습니다. 1985년 5월에 제1 가나안 농군학교에서 있었던 직능 지도자 새마을 교육 제39기생들의 주소록인데, 흥미로운 부분은 부동산 소개업을 하는 분들만 모아서 새마을 교육을 한 것 같습니다. 직능별 교육이야 늘 있는 일이겠지만, 저는 복덕방 아저씨들만 모아서 교육했을 거라고는 상상해 보지 못했습니다. 어린 시절 제게 남았던 복덕방 아저씨의 전형적인 이미지는 하루 종일 담배 피우면서 장기를 두는 사람이었거든요. 지루하면 다방에서 커피를 시켜 드셨죠. 이때 커피 두 잔을 시키면 화려한 머리띠를 한 여성분이 쥬시후레시껌을 씹으며 보온물통과 커피를 들고 와서 커피 석 잔을 타서 장기 두던 손님 두 명과 자기가 한 잔씩 마시는 그런 장면이 떠오릅니다. 다시 생각해 보아도 이런 분들이 교육이 되나 싶습니다. 혹시 가나안 농군학교에서 새마을 운동 교육을 한 것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분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가나안 농군학교는 새마을 운동의 모태로 이미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새마을 운동은 1970년 시작된 범국민적인 지역 사회 개발 운동인데, 이 운동의 정신적인 모델이 바로 가나안 농군학교의 의식 개혁 교육이었습니다. 1962년 가나안 농군학교를 방문했던 박정희 대통령이 의식의 변화, 근면, 자조, 자립, 그리고 빈곤의 퇴치를 추구하는 가나안 농군학교의 교육 방향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이것이 새마을 운동이라는 국가사업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지금도 가나안 농군학교는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제는 국제적인 단체가 되었습니다. 1991년에 방글라데시를 시작으로 필리핀, 태국, 미얀마, 중국, 인도네시아, 인도, 요르단, 라오스 등지에 농군학교를 설립했고, 이제 세계 가나안 운동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남시에 있었던 제1 가나안 농군학교는 2014년에 양평으로 이전했다가 2022년에 폐교했지만, 제2 가나안 농군학교가 교명을 가나안 농군학교로 바꾸고 계속해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산하 기관으로 가나안 세계 지도자 교육원, 가나안 평생 교육원, 성도원, 가나안 치악산 캠프. 세계 가나안 운동 본부가 있습니다. 제1 가나안 농군학교가 사라진 것은 아쉽지만, 하남시에는 김용기 장로님과 가나안 농군학교의 관련 유물을 관람할 수 있는 일가 기념관이 있습니다. 그 옆에는 일가 도서관이 있는데, 하남시 역사를 특별히 보존하는 아카이브 도서관입니다. 한번 들러보시기 바랍니다. 이 글은 (사)기독교윤리실천운동의 <좋은나무>에 게시된 글을 전재한 것입니다. 전재 글 바로가기 ☞ 『가나안으로 가는 길』과 가나안 농군학교 주소록(2)
-
2026 배리어프리 기획전시 <서로가 서로를> 틈사이로팀 작가 인터뷰
갤러리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유튜브 : 《서로가서로를》2회차전시. '바라보는 방법' 전시 영상(작가 인터뷰) ☜ 클릭하시면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2026년도 기획전시_배리어프리 특별 미술전 <서로가 서로를> 2회차 [서로가 서로를_바라보는 방법] 참여작가팀인 <틈사이로>팀의 작가 인터뷰 영상입니다. 제작 및 주관: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협력 : 서부장애인종합복지관
-
『가나안으로 가는 길』과 가나안 농군학교 주소록(1)
갤러리큰 일과 작은 일, 큰 사람과 작은 사람 세상에는 크고 중요한 일이 있는가 하면 평범하고 작은 일도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보통 큰 일이라고 하면 국가적 이벤트나 정치적 사건, 또는 큰 이익이 오가는 경제적 활동을 말합니다. 큰 사람과 작은 사람도 있지요. 요즘 세상에서는 영향력이 큰 이들이 큰 사람인 것 같습니다. 주로 정치인이나 경제인이 여기에 들어갑니다. 요즘은 인플루언서라고 부르는(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사회적 영향력을 갖는 직업도 생겨났습니다. 이러한 큰 사람들은 선망과 성원의 대상이 됩니다. 그만큼 적이 많아지기도 합니다. 우리는 대개 큰일에 많은 관심을 쏟고 큰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고, 주변으로부터 존중받고 싶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세태 속에서 뜻밖의 이야기를 건네는 이가 있습니다. [나는 내가 평범한 농사꾼임을 후회하거나 큰 인물이 못되고 작은 인물이 된 것을 후회한 일은 단 한 번도 없다. 나는 언제나 나 자신에 만족한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에 맞는 작은 일 밖에는 할 줄 모른다. 그러나 그 작은 일도 오랜 세월을 두고 쌓아 올리면 그것이 큰 일이 된다. 그것이 나의 살아가는 방침이요 이 책의 기록이 바로 그것이다!] 가나안 농군학교를 설립한 김용기 장로가 쓴 『가나안으로 가는 길』의 한 대목입니다. 작은 일을 하며 묵묵히 살아가는 우리 모두, 화이팅입니다! 그러나 김용기 장로님이 ‘나는 작은 인물이고 작은 일 밖에 할 줄 모른다’라고 고백한 말씀은 과연 그러한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마다 다르게 볼 수는 있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이만큼 큰 일을 하신 큰 어른도 없으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우리 문화관이 상설 전시하고 있는 『가나안으로 가는 길』 책과 가나안 농군학교 문서 이야기와 함께, 김용기 장로님과 가나안 농군학교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가나안으로 가는 길』은 여러 번 재판된 책인데(최근 개정판은 규장, 2014) 우리 문화관은 1968년 판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김용기 장로의 이야기는 흥미롭습니다. 장로님은 워낙 한국 역사에 족적이 뚜렷한 분이라 여러 사람이 이 분의 생애를 연구했습니다. 저는 장로회신학대학에서 김용기 장로 연구로 석사논문을 쓴 차주만 선생의 글이 제일 흥미로워서, 그 글을 중심으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일가(一家) 김용기의 성장기 김용기 장로님은 1912년에 태어나신 것 같습니다. ‘같다’라는 말이 좀 이상하게 들릴 수 있겠습니다. 당시의 출생 등록 관행이 요즘 같지 않아서, 김용기 장로님의 생애 연구들도 어떤 것은 출생 연도를 1907년, 어떤 것은 1909년, 또 어떤 것은 1912년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1980년에 출판된 자서전 『나의 한길 60년』에서는 1912년 9월 5일이 생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때는 한일 강제 병합 직후였으니 사회 분위기가 정말로 심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장로님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독립’, ‘민족’ 이런 이야기를 지겹도록 들으셨다고 합니다. 3.1운동 때는 어른들 틈에서 만세를 부르셨다고 합니다. 1919년이면 장로님이 7살일 때였습니다. 말하자면 민족운동 꿈나무로 자라나신 것입니다. 광동학교에 진학했을 때 조원택이라는 체육 선생님을 만나게 되시는데, 이분이 또 학생들의 마음에 민족혼을 불 지피는 분이었다고 합니다. 결국 19살이 되던 해에 일이 터지고야 맙니다. 장로님은 일제를 멸망시키기 위해 우선 중국을 지배해야겠다는 마음을 품으셨습니다. 아니 이게 무슨 말인가요. 스케일이 커도 너무 큽니다. 뜻을 품은 사나이는 머뭇거리지 않는 법, 장로님은 40여 장의 긴 편지를 아버지께 남기고 집을 떠나 중국으로 향하셨습니다. 그리고 심양에서 서탑교회 목사였던 독립운동가 이성락 목사님을 만납니다. 두 분의 일화가 재미있습니다. 장로님은 일단 마적단으로 들어간 다음에 군인이 될 생각을 품으셨습니다. 목사님께 이 이야기를 하면서 군인으로 세력을 계속 확장해서 중국 본토를 우리 민족의 땅으로 되찾겠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무협지처럼 허황돼 보이는 이야기입니다. 아무튼 이 이야기를 들은 목사님은 장로님을 데리고 식당에 가셨습니다. 그리고 커다란 전병을 시켜 놓고 한복판부터 파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장로님이 이 큰 걸 어떻게 복판부터 먹냐고 하자 목사님이 소리를 지르셨답니다. “떡 한 조각도 복판에서 못 먹겠다는 주제에 중국 대륙을 복판에서 먹겠다고?” 이 말을 들은 장로님은 자신의 생각이 허황되다는 걸 느끼고 두 달 만에 고향으로 돌아오셨습니다. 포기도 빠르셨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했는가 하면, 겨우내 성서를 읽으셨습니다. 성서를 완독한 다음에는 강화도의 마니산에서 40일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인생 최대의 엄청난 결단을 내리셨습니다. 농사꾼이 되기로 하신 것입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장로님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기가 참 어려웠습니다. 군인이 돼서 중국을 정복하겠다고 했다가, 몇 달 뒤에 평생 농사를 짓겠다고 다짐하는 이 엄청난 격차!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뒤에 펼쳐지는 이야기를 보면 이해가 됩니다. 그냥 농사를 짓겠다는 게 아니라 이상촌을 만들겠다는 결심이었던 것입니다. 그럼, 이상촌을 만들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장사를 합니다. 이상촌 건설에는 돈이 많이 들 것이니까요. 잡화상과 이발소를 하셨다는데, 장사가 잘 되어 돈을 좀 버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누가 돈을 좀 벌었다고 하면 다가오는 사기꾼에게 걸려들어서, 광산에 투자했다가 벌어 놓은 돈을 모두 날리셨습니다. 하지만 비범한 인물은 실패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기 마련입니다. “이상촌은 돈만이 아니라 피와 땀으로 일구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고 고리대금업자를 찾아가 “몸뚱이가 내 담보”라는 말로 400원을 빌리셨습니다. 그리고 비탈진 산 3천 평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부인과 둘이서 그 땅을 개간하셨습니다. 3년 동안 개척한 땅은 훌륭한 과수원과 고구마밭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걸 1,200원에 팔았습니다. 돈을 갚고 800원이 남았고, 이걸로 또 마을 앞산 4,100평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이상촌을 건설할 목적으로 동지들을 불러들입니다. 제일 먼저 달려온 것은 몽양 여운형 선생의 6촌 동생인 여운혁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여러 명의 동지가 합류하면서 10세대가 모이게 됩니다. 이상촌 운동을 함께 펼쳐나갈 공동체가 생겼습니다. 우선 살 집을 짓고 집 둘레에 무궁화를 심어 담장을 대신했습니다. 그리고 마을 중앙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김용기 장로님의 1차 이상촌 개척이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다음 글에서 계속.) 이 글은 (사)기독교윤리실천운동의 <좋은나무>에 게시된 글을 전재한 것입니다. 전재 글 바로가기 ☞ 『가나안으로 가는 길』과 가나안 농군학교 주소록(1) - 기독교윤리실천운동
-
컴패션 꽃신
갤러리해방과 전쟁 1945년 한국은 해방이 됩니다. 그리고 분단됩니다. 우리가 자발적으로 선택한 분단이 아니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강대국이 만들어 낸 냉전의 질서가 오랫동안 친구와 이웃으로 지내오던 사람들을 가르고 찢어놓았습니다. 끝까지 통일된 국가를 주장하던 김구와 여운형 같은 민족 지도자들은 암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서로 다른 정치적 미래를 원했던 사람들은 서로를 죽였습니다. 대규모의 학살이 대구에서, 제주에서, 여수와 순천에서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1950년,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이전의 학살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재앙이 덮쳤습니다. 얼마나 끔찍했는지 맥아더는 미국 의회에서 이런 발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평생을 전쟁 속에서 보낸 저와 같은 군인에게조차 이러한 비참함은 처음이어서, 무수한 시체를 보았을 때 구토를 하고 말았습니다.] 맥아더는 수많은 무공을 세운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으로 태평양 방면 연합군 총사령관이었습니다. 그래서 6.25 전쟁에서도 유엔군 총사령관을 맡았습니다. 이런 역전의 노장도 구역질을 하게 만들 정도의 끔찍함. 저는 상상이 안 가지만 상상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해방 이후의 이 죽고 죽이는 과정에서 기독교는 대체로 우익에 속했습니다. 그리고 우익의 핵심 세력이 되어 좌익과 격렬한 투쟁을 벌였습니다. 많은 기독교인이 좌익 세력에 의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좌익 사람들이 기독교인의 공격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우리는 좌익에 의해 희생당한 기독교인들의 이야기만 전하며 그분들을 순교자로 기리고 있지만, 정부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전합니다. 다음은 김동춘 상임위원의 말입니다. [내가 위원회 조사를 지휘하면서 확실히 얻을 수 있었던 결론은 한국전쟁기 국군, 경찰, 우익 세력에 의한 학살 규모가 인민군 혹은 지방 좌익에 의한 학살 규모보다 훨씬 컸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터부가 된 논리, 즉 전쟁기 ‘빨갱이의 잔혹성’은 어느 한쪽의 사실과 기억만 과장한 것이다. 대한민국 군경은 매우 잔혹했고 실제로 인민군보다 죄 없는 민간인을 더 많이 죽였다. 우리 국가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불편한 진실’이지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지옥 속의 교회 기독교가 현실을 지옥으로 만드는 일에 일부 참여하기도 했습니다만, 다른 한편으로는 생지옥에서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다시 일어서기 위해 의지할 수 있었던 곳도 교회였습니다. 1952년 3월 통계를 기준으로 남한의 인구 약 2,100만 명 중에 구호 대상자는 1,040만 6천 명이었습니다. 50% 정도의 사람이 전쟁 피난민이거나, 이재민이거나, 아니면 전쟁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고통받는 빈민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당시 한국 정부나 민간단체들은 이 문제에 대응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세계 교회는 한국을 재건하는 일에 앞장서 주었습니다. 한국 교회에 구호 금품을 보내 주거나 직접 내한하여 구호 활동을 펼친 기독교 기관들이 40여 개에 달합니다. 이 수치는 당시 민간 구호 단체의 대다수가 기독교 단체였다는 의미입니다. 전쟁 이후에 가장 활발하게 구호 활동을 펼친 단체는 미국 가톨릭구제위원회와 미국 기독교교회협의회의 기독교세계봉사회였습니다. 봉사회는 세계교회협의회의 구호 활동도 대행했는데, 구호와 보건, 그리고 사회 재건의 영역에서 피난민, 여성과 아동, 부상자 등을 위한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였습니다. 굉장히 큰 규모의 지원이 교회를 매개로 한국에 전해지면서 자연스럽게 한국 교회는 고아와 과부, 나그네를 위한 사업에 나서게 되었고, 선교사와 한국 교회 지도자의 주도로 여러 기관이 설립되었습니다. “어른들의 전쟁으로 인한 가장 큰 피해자는 바로 ‘아동’입니다.” 세이브더칠드런이라는 아동 구호 단체의 슬로건입니다. 전쟁의 피해는 모두에게 평등하게 나눠지지 않습니다. 약한 존재일수록 더 큰 피해를 보게 됩니다. 꼭 전쟁이 아니더라도 재난 상황은 언제나 약자들에게 더 가혹합니다. 따라서 6.25 전쟁기에 아이들을 보호하려는 교회의 움직임은 꽤 활발했습니다. 1950년대 초중반에 설립된 기독교 아동 구호 단체 중에는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단체들이 있습니다. 그중 다음 세 단체가 유명합니다. 하나는 1950년 9월 밥 피어스 목사와 한경직 목사의 주도로 설립된 ‘한국 선명회’입니다. 지금은 월드비전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합니다. 홈페이지에 가보시면 ‘세계 최대 국제 구호 개발 NGO’라고 스스로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 이 한국선명회의 강연회에 참석했다가 한국의 현실을 듣고 내한한 해리 홀트가 1956년 설립한 ‘홀트씨 해외 양자회’가 있습니다. 지금의 홀트아동복지회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참전 미군을 돌보기 위해 한국에 온 에버렛 스완슨 목사가 밤새 얼어 죽은 아이들의 시신이 쓰레기처럼 취급받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1952년 설립한 ‘에버렛 스완슨 전도 협회’가 있습니다. 지금은 컴패션이라는 이름의 국제 아동 구호 단체가 되어 있습니다. 70년 전 한국의 전쟁고아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가 지금은 세계의 어린이들을 상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씨앗이 자라 나무가 되었습니다. 컴패션 꽃신 사진에 보이는 것은 에버렛 스완슨 전도 협회, 즉 컴패션의 기념품입니다. 꽃신의 모형을 금속 재질로 만든 것입니다. 한국 고아들을 후원하는 미국 등지의 후원자들에게 전달되었던 선물입니다. 한국컴패션과 우리 문화관은 2024년 6월 업무 협약을 맺었습니다. 컴패션이 가지고 있는 문화유산을 우리 문화관이 안전하게 보관하고 많은 분들이 향유하실 수 있도록 활용하자는 취지의 협약이었습니다. 그 협약에 따라 컴패션의 유산들이 우리 기관에 기탁되었는데, 이 꽃신은 그중 하나입니다. 아무튼 이 컴패션의 기념품이 꽃신 모양을 한 것도 다 이유가 있습니다. 에버렛 스완슨 목사가 후원자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가 있었거든요. 지금 한국이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지만 원래는 고유하고 아름다운 문화를 가진 나라라는 것을 꼭 알리고 싶었다고 합니다. 미국과 유럽의 후원자들이 한국을 그런 나라로 기억하길 바랐기 때문입니다. 한국적 아름다움은 유려하고 우아한 곡선에서 나온다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이 꽃신 조형물도 그 우아한 곡선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익숙한 것이라 그 아름다움을 잘 느끼지 못할 수도 있는데, 한국에 온 지 오래되지 않았던 한 서양인이 그 아름다움을 눈여겨보고, 신선하고 가치 있게 여겼다는 것에 묘하게 마음이 움직입니다. 이 글은 (사)기독교윤리실천운동의 <좋은나무>에 게시된 글을 전재한 것입니다. 전재 글 바로가기 ☞ 컴패션꽃신(손승호)- 기독교윤리실천운동
-
한국 교회의 어두운 역사와 히노마루 부채
갤러리어두운 역사의 가치 그림자는 실체가 있음을 보여 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그림자가 있습니다. 물리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제가 대학원을 다닐 때 당나라 시대 경교의 한반도 유입설을 배웠는데요. 가능성은 높지만 들어왔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 요지였습니다. 그때 지도교수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새로운 종교가 한반도에 들어왔다면 반드시 갈등이 생겼을 텐데 그런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그림자마저 없다면 실체도 없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어두운 역사는 우리가 이 땅에 살았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일지도 모릅니다. 어두운 역사에는 또 다른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는 밝은 역사를 통해 내가 속한 공동체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소속감과 자긍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역사교육을 통해 얻고자 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어두운 역사에 대해서도 반드시 가르쳐야 합니다. 과거의 잘못들을 잊지 않아야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두운 역사를 통해 지혜와 양심을 키울 수 있습니다. 밝은 역사와 어두운 역사 중 어느 것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할까요? 저는 압도적으로 어두운 역사의 편을 들겠습니다. 애국이란 이름의 전쟁 협력 일제 말 한국 교회는 일제의 침략 전쟁인 태평양 전쟁을 돕는 다양한 친일 행위를 했습니다. 1940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친일 통계를 발표한 정인과 목사의 말을 한번 볼까요? [우리 장로교 교우들이 다른 종교 단체보다 먼저 시국을 철저하게 인식하고 성의껏 각자의 역량을 다하여 전승, 무운장구 기도, 전사병 위문금, 휼병금, 국방헌금, 전상자 위문, 유족 위문 등을 사적으로 공동 단체적으로 활동한 성적은 이하에 숫자로 표시되었습니다. … 애국반원들의 활동의 소식을 들을 때 … ‘이만하면’하는 기쁨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만하면 하는 기쁨”이라는 말은, 결국 다른 종교나 교파와 비교했을 때 실적이 매우 좋아서 뿌듯하다는 말인 것입니다. 다들 일제 말기에 무기 만든다며 교회 종이나 철문을 일제에 강탈당했다는 이야기만 들으셨겠지만, 그것은 일부일 뿐입니다. 이는 자신이 피해자일 뿐 잘못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구는 부적절한 태도이기도 합니다. 『경안노회사』의 한 대목을 같이 보시죠. [비안면 화신교회는 쌍계교회로 합동하고 예배당을 200원에 매각하여 50원은 국방헌금을 하고 50원은 본교회의 부채금을 상환, 잔금은 본교회 수리비로 사용했다. 안동에서는 1942년 3월 15일에 동부교회와 안기교회가 안동교회로 통폐합되었다. 양교회의 대지와 건축 대금으로 14,000원을 받아 9,000원은 국방헌금으로 기부하고, 3,000원은 안동여자고등학교에 사용 그 나머지 2,000원만 본 교회에서 사용했다. 영주에서도 1942년 2월 6일 같은 절차를 밟아 영주 제일 교회로 합동하고 국방헌금을 했고….] 종이나 철문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아예 교회를 팔아서 통폐합하여 매각하고 그 대금을 전쟁에 사용하라고 국방 헌금이란 명목으로 일제에 바쳤다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일제에게 강제로 빼앗긴 것도 분명 있겠지만,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일제의 전쟁과 정책에 협력한 부분 또한 부인할 수 없습니다. 1941년에 있었던 한국 장로교 총회 30주년 기념식에서는 다음과 같은 결의문이 채택되기도 했습니다. [동양 평화를 확보하고 팔굉일우(八紘一宇)의 대 이상을 구현하는 것은 황국 부동(不動)의 국시다. 지금이야말로 적성 국가의 제국에 대한 도전적인 태도는 더욱 노골화되고 우리 국시 수행의 방해에 광분하고 있어서 시국의 긴박이 바로 절실한 것이다. 이 비상의 때에 홀로 기독교도만이 초연함은 단연 용인될 바 아니다. 우리들 장로파 36만 신도는 뭉쳐 하나가 되어서 불퇴전의 결의로써 국책에 순응하고 결전 태도를 실천 확립해서 시한 극복에 정신(挺身)할 것을 기한다. 소화 16년 11월 22일 조선야소교장로회 총회장.] 저는 이 글에서 민족이니 친일이니 하는 거창한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주님을 평화의 왕이라고 부를 자격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신사참배를 우상숭배라며 수차례 공식적인 죄책 고백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침략 전쟁을 지원했던 것에 대해서는 제대로 반성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신사참배와 전쟁 협력 둘 다 잘못이겠지만 저는 신사에 가서 머리를 숙인 것보다 이웃을 죽음으로 내몬 것이 더 큰 죄라고 생각합니다. 히노마루 부채 오늘 보여 드리는 히노마루 부채는 태평양 전쟁 당시 전선에 나가 있는 군인들을 위해 후방에서 만들어서 보낸 물건입니다. 더위를 식히는 용도였습니다. 이 부채는 국방부인회에서 제작해 헌납한 것이며, 앞면에는 일장기가 뒷면에는 ‘국방 부인의 노래’와 ‘총후의 꽃’이라는 두 곡의 노랫말이 적혀 있습니다. 지난 글에서도 소개했던 홍이표 선교사님이 일본에서 구해 와서 기증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히노마루 부채는 한국 교회가 전쟁 지원품으로 열심히 헌납한 물품 중 하나입니다. 1942년 7월 2일 자 「기독교신문」을 보면 원산에서 기독교연합회가 주최한 예배 중 히노마루 부채 헌금이 있었다고 하며, 4월 28일 자 「매일신보」에는 양주삼 목사가 매일신보사에 들러 부채 1천 개의 대금을 기탁했다는 기사가 있습니다. 5월 22일자 「매일신보」에는 “적성의 히노마루 부채 신의주서 만본 헌납: 야소교도들 애국의 열정”이라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습니다. 뒷부분을 같이 살펴볼까요? [귀사에서 히노마루 부채를 헌납한다는 사고(기사)를 보고 의산노회 교직자 혁신회에서는 전교도의 헌납을 꾀하였습니다. 세간에서는 기독교도들은 찬송가나 부르고 기도나 하는 줄 알지만 우리들은 신앙보국이라는 큰 깃발 밑에서 국책에 순응하려 합니다. 귀사의 이 헌납 운동은 실로 더운 지대에 출정한 육해군 장병에게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을 알고 그나마 1만 본을 헌납한 것입니다. 이 헌납하는 부채에는 나라에 충성을 다하는 붉은 신앙이 있은 것을 특별히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신앙보국”, “붉은 신앙”이라는 말이 결코 좋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우리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이 굳이 이 히노마루 부채를 전시해 둔 이유는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습니다. 우리가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았으면 하기 때문입니다. 부디 우리가 언제나 전쟁의 가장 반대편에 서 있기를 바랍니다. 이 글은 (사)기독교윤리실천운동의 <좋은나무>에 게시된 글을 전재한 것입니다. 전재 글 바로가기 ☞ 한국 교회의 어두운 역사와 히노마루 부채(손승호)- 기독교윤리실천운동
-
[내부점검] 사이트 소유확인
갤러리[내부점검] 사이트 소유확인중입니다.
-
남궁억의 무궁화 한반도 지도
갤러리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유물소개(5) 남궁억의 무궁화 한반도 지도 - 손승호(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사무국장) 나라꽃 무궁화 무궁화가 우리나라 꽃이라는 것을 모르는 분은 별로 없을 겁니다. 무궁화는 법으로 정해지지는 않았지만 관습적으로 인정되는 우리나라 꽃입니다. 법으로 정한 것이 아니라고 하면 의아해할 분도 있을 것 같은데요. 나라꽃을 법으로 정한 나라보다 관습으로 정한 나라가 더 많다고 합니다. 오랫동안 그 나라 사람들이 사랑했던 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거든요. 물론 법으로 정한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은 1986년에 법으로 장미를 미연방 국화로 정했죠. 특이하게도 한 가지 장미 품종이 아니라 장미 전체를 국화로 정했는데, 미국의 다양성을 반영하려는 의도라고 합니다. 아무튼 우리의 무궁화는 오래전부터 사랑받아 온 꽃입니다. 고조선 이전부터 하늘나라의 꽃으로 인식되었다고 합니다. 신라 시대의 외교 문헌에는 신라를 근화향(槿花鄕: 무궁화 나라)이라고 표현한 것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부르는 애국가 후렴에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이라는 말이 나오는데요, 그 말이 처음 노랫말에 쓰인 것은 1800년대 말 배재학당 등에서 부르던 “무궁화가”라는 노래입니다. 그러니까 조선에서도 왕실은 오얏꽃(梨花)을 왕실 상징으로 사용했지만, 민중들은 무궁화를 우리나라, 혹은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꽃으로 이해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조선인들이 무궁화의 끈질긴 생명력을 조선의 독립 의식을 고취하는 데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일제가 깨닫고 탄압하면서, 무궁화는 오히려 사람들에게 완전히 나라꽃으로 각인됩니다. 일제가 무궁화를 탄압했던 대표적인 사건이 남궁억 선생이 연루된 ‘무궁화 사건’입니다. 한서 남궁억 선생 남궁억(南宮檍, 1863.12.27.-1939.4.5.) 선생은 다양한 면면을 지닌 분입니다. 독립운동가이자 계몽 운동가와 교육자로 가장 널리 알려졌지만, 시인이기도 하고 작곡‧작사가, 저술가, 언론인이기도 합니다. 작곡한 곡이 한 100편 된다고 하는데요. 그중에 기독교인들에게 제일 유명한 것은 찬송가에도 수록된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입니다. 이래저래 이루신 일이 참 많으시죠. 보통 ‘한서 남궁억’이라고 많이 부르는데요. 한서(翰西)는 남궁억 선생의 호입니다. 선생은 조선 말과 대한제국기에는 공무원이었습니다. 고종의 통역관이었다가, 내무부 토목국장을 맡아서 탑골공원 공사를 감독하고, 서울의 도로를 정비하는 등의 일을 하기도 했죠. 공무원으로 잘 지내던 선생이 관직을 내려놓게 된 것은 을사늑약 때문입니다. 남궁억 선생의 사직은 그러니까 원래는 망할 리 없는 회사가 망했기 때문이랄까요. 나라가 그렇게 기울어 버리니 남궁억 선생은 공무원으로 남아 있는 것보다는 계몽과 교육에 헌신하여 나라를 지키는 것이 시급하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1907년에는 동지들과 애국 계몽 운동을 위해 대한협회(大韓協會)를 창립하고 회장이 됩니다. 이듬해에는 관동학회(關東學會)를 창립하고 교육 잡지 「교육 월보」를 발행합니다. 정말 에너지가 많은 분입니다. 그러다 1910년 한일 강제 병합으로 대한제국이 완전히 멸망하자 교육 현장에 뛰어들기로 결심하고 배화학당(培花學堂) 교사가 됩니다. 그리고 ‘무궁화 지도’ 도안을 만들어서 배화학당 학생들이 자수를 놓게 하죠. 애국 계몽 운동에 전념하다가 건강을 잃은 선생은 1918년 홍천으로 낙향을 하는데요. 거기서도 쉬지 않습니다. 1919년에 모곡학교(牟谷學校)를 설립하고 거기서 무궁화를 키우고 전국에 보급하기 위해 애를 씁니다. 무궁화 심기 운동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정말 남궁억 선생은 저로서는 엄두도 못 낼 에너지를 가진 분입니다. 하지만 일제가 남궁억 선생을 가만둘 리가 없었습니다. 1933년 일제는 무궁화 심기 운동이 불온한 사상을 전파하고 치안을 악화시킨다면서 남궁억 선생은 물론 모곡학교의 교직원들, 교회 목사님 등을 잡아들이고 무궁화 묘목을 태워버립니다. 이때 태운 묘목이 한 8만 주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1933년에 모곡학교 학생 실습지에 그 정도의 무궁화가 있었다고 한다면 모곡학교를 설립한 이래 남궁억 선생이 전국에 보급한 무궁화는 적어도 몇십만 주에 이르렀을 것 같습니다. 이것이 무궁화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조사하던 일제는 남궁억 선생을 비롯한 홍천의 감리교인들이 비밀 결사 ‘십자당’(十字黨)을 만들어서 박애, 평등, 평화 등의 가치에 입각한 ‘공존공영의 지상 천국 건설’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십자당의 기독교 정신은 사회주의와도 유사한 부분이 많았기 때문에 일제 입장에서는 꼴도 보기 싫은 두 개의 사상이 접붙은, 불온사상의 끝판왕이었을 겁니다. 결국 사건은 더욱 크게 확대되어 많은 기독교인이 체포되었고, 십자당의 주동자였던 남궁억 선생은 옥고를 겪게 됩니다. 수감 생활 중이던 선생은 노령임이 참작되어 1935년에 병보석으로 풀려났지만 고문 후유증으로 1939년 돌아가십니다. 안타깝습니다. 선생이 하신 일이 워낙 많다 보니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습니다. 홍천에 가시면 무궁화 마을과 한서 남궁억 기념관이 있습니다. 한번 방문해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무궁화 한반도 지도 오늘 보여드리는 지도가 남궁억 선생이 도안한 무궁화 지도입니다. 자수를 누가 놓았는지, 제작한 시기가 언제인지는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남궁억 선생의 도안이 원체 사랑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무궁화 지도는 해방 이후에도 꾸준히 제작되었고, 여러 박물관에서 수집해서 보관, 전시하고 있습니다. 우리 역사문화관도 홍승표‧홍이표 목사님의 기증을 받아 전시하고 있습니다. 도안을 살펴보면, 무궁화의 가지로 한반도 형태를 잡고 있고, 꽃 13송이로 전국 13도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13도는 1896년에 시행된 조선의 지방 제도를 따른 것입니다. 8개의 도(경기, 충청, 전라, 경상, 황해, 평안, 강원, 함경) 중에 남부의 3개(충청, 전라, 경상), 북부의 2개(평안, 함경) 도를 남북으로 나누어 모두 13도입니다. 지금의 행정구역 편제와는 다르지만, 북한의 변화가 큰 반면 남한은 큰 틀이 유지되고 있다 보니 이 지도에 그려진 한반도를 훨씬 익숙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주도와 울릉도는 무궁화나무의 잎사귀로 표현했습니다. 남해와 동해의 영토도 신경을 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독도가 없는 것이 좀 아쉬울 분도 있을 것 같네요. 지금 일본이 트집을 잡는 곳이 그곳이니까요. 하지만 울릉도는 표시되어 있습니다. 독도는 늘 한반도의 일부였고 남궁억 선생이 이 지도를 도안할 당시 독도는 울릉도의 어민들도 단지 울릉도의 부속 섬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인식이 미미했었으니까요. 너무 아쉬워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암튼 남궁억 선생을 비롯한 많은 기독교인들이 무궁화를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무궁화에 빗대어 우리 민족이 끈질기게 살아남아 다시 독립할 것이라는 생각을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그래서 이 지도는 한국 기독교의 애국 애족을 잘 보여 주는 동시에 무궁화가 지금 한국의 나라꽃이 되어 있는 것에 한국 기독교의 영향도 있었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이 글은 (사)기독교윤리실천운동의 <좋은나무>에 게시된 글을 전재한 것입니다. 전재 글 바로가기 ☞ 남궁억의 무궁화 한반도 지도(손승호) - 기독교윤리실천운동
-
독립운동 태극기
갤러리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유물소개(4) 독립운동 태극기 - 손승호(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사무국장) ‘충군애국’의 교회 교회는 일반적으로는 국적을 뛰어넘습니다. 복음은 ‘어느 민족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것이고, 교회는 어느 특정 민족이나 국가가 아닌 모든 인류와 창조 세계를 위해 존재합니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 그런 교회를 볼 기회는 드뭅니다. 대부분 교회는 지역과 시대의 한계 속에 자리 잡게 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보편적 복음은 지역, 국적, 민족 등 인류를 구분하는 범주와 만나 현실의 교회를 이룹니다. 그래서 탄자니아 교회, 인도네시아 교회, 한국 교회, 몰도바 교회처럼, 각 교회는 현지인들의 상황과 특성에 맞는 독특성과 지향을 가지게 됩니다. 초기 한국 교회는 ‘충군애국’의 교회라고 불렸습니다. 국권이 위태로웠던 시기에 수용된 기독교의 복음이 민족주의와 긴밀히 연결되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한국에 들어왔던 천주교가 ‘무군무부’(無君無父, 임금도 아버지도 없는)의 종교로 치부되면서 엄청난 박해를 받았던 것을 본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은 ‘우리는 천주교와 달리 왕실과 민족에 이로운 종교’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을 학자들은 ‘이체선언’(異體宣言)이라고 부르는데, 한국 기독교의 차별화 전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덕분이라고 할까요? 조선인들은 초기부터 어렵지 않게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교회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들은 한국 교회의 흥미로운 특징으로 ‘애국심’을 꼽았습니다. 하지만 이를 마냥 좋게 보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정치적‧민족적 성격이 강한 것에 대해 우려를 표했습니다. 1897년 9월 2일 자 「독립신문」의 사설에는 그 전날 평양에서 열렸던 고종 임금 탄신일 경축 행사의 모습이 나옵니다. 여기에 이름이 나오는 한석진, 방기창 같은 분들은 첫 한국인 장로회 목사로도 널리 알려진 분들입니다. 아무튼 이 기사의 내용은 기독교인들이 고종의 생일 축하 행사를 하면서 임금에 대한 충성을 표시하고, 독립가를 부르고, 부국강병한 나라가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는 겁니다. 말 그대로 충군애국입니다. 심지어 평양의 기독교인들은 “임금과 국기를 목숨보다 중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동양 사상의 토대라고 할 수 있는 ‘태극’을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사랑하게 되었다니 생각해 보면 신기한 일입니다. 이후에도 태극기는 기독교인들의 핫한 데코 아이템으로 각종 모임에 단골로 등장했습니다. 그만큼 한국 교회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나라를 사랑했고, 또 나라를 사랑하는 만큼 태극기를 사랑해 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태극기 사랑의 역사를 더 자세히 알고 싶은 분은 홍승표 박사의 『태극기와 한국교회』(이야기books, 2022)를 보시기 바랍니다. 이 책에서는 태극 사상에 대해 한국 기독교가 어떻게 반응했는지도 다루고 있습니다. 독립운동 태극기 오늘 보여 드리는 태극기는 일제 강점기에 제작된 것으로 독립운동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것인데, 리준만국평화재단 이양재 이사장님이 우리 문화관에 기증해 주셨습니다. 리준만국평화재단은 고종의 특사로 헤이그에 갔다가 순국한 이준 열사를 기리는 단체로 독립운동과 기독교 관련 문화유산을 많이 수집하고 있으며, 우리 문화관에 많은 문화유산을 임대해 주어 상설 전시관에서 전시하고 있습니다. 우리 문화관 인근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진관사에는 아주 유명한 태극기(1919년 제작 추정)가 있습니다. 이양재 이사장님은 ‘옆집에 그런 게 있으면 여기에도 이런 거 하나쯤 있어야 하는 거 아니겠냐’고 웃으며 말씀해 주셨습니다. 리준만국평화재단이 제주에 박물관을 설립하고자 하는 계획도 순조롭게 진행되기를 바랍니다. 아무튼 진관사 태극기와 사진으로 보시는 태극기가 모두 지금의 태극기와는 모양이 좀 다릅니다.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건곤감리의 위치입니다. 감(5)과 리(4)의 위치가 맞바뀌어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태극기의 제작법이 한 가지로 확정된 것은 대한민국 문교부가 국기 제작법을 고시한 1949년 10월 15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제 강점기의 태극기는 아직 모양이 통일되어 있지는 않았습니다. 또 진관사 태극기와 이 태극기의 공통점은 일장기 위에 먹으로 덧칠해서 제작했다는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여기저기에 일장기가 게양되어 있었을 텐데 청년들이 아무도 안 보는 야심한 시간에 일장기를 떼 와서 교회나 법당 같은 곳에 숨어서 먹으로 덧칠하거나 도장을 찍는 방식으로 태극기를 만들었다는 겁니다. 생각해 보면, 하얀 천과 빨간색, 파란색, 검은색 물감을 사다가 태극기를 만들려면 돈도 시간도 많이 들었을 것이고, 일제 순사에게 걸리면 “우리 태극기 만들 준비해요”라고 광고하는 거나 다름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일장기에다가 먹으로 칠하고 덧그리기만 해도 태극기임을 사람들이 알아볼 테니 간단하고, 싸고, 빠르게 만들 수 있는 이 방식이 나쁘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국의 국기를 훼손당한 일제의 입장에서는 기분이 더욱 나빴겠지만 조상님들의 슬기를 생각해 보면 유쾌합니다. 물론 지금은 남의 나라 국기를 훼손하고 변형하면 안 되겠지만 말입니다. 이 글은 (사)기독교윤리실천운동의 <좋은나무>에 게시된 글을 전재한 것입니다. 전재 글 바로가기 ☞ 독립운동 태극기(손승호) - 기독교윤리실천운
-
게일 선교사의 서울 지도
갤러리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유물소개(3) 게일 선교사의 서울 지도 - 손승호(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사무국장) 제임스 게일 선교사 제임스 게일(James Scarth Gale, 1863. 2. 19. – 1937. 1. 31.)은 한국학자로도 유명한 선교사입니다. 캐나다 온타리오 웰링턴의 앨마에서 태어난 게일은 프랑스에서 유학하던 1885년부터 다양한 선교 활동에 참여했습니다. 유학을 마치고 캐나다에 돌아와서는 토론토 빈민가에서 도시 선교에 참여했었습니다. 그는 유니버시티칼리지 YMCA의 부회장이기도 했습니다. 1888년 4월 12일, 이 기관에서 조선 선교사로 결정되어 그해 12월 평신도 독립 선교사로 내한하였습니다. 한국에 와서는 송수경이라는 조선인에게 한국어를 배웠고, 이름 모를 한학자가 기일(奇一)이라는 한국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기’를 소릿값으로 갖는 한자가 굉장히 많은데 그중에서도 ‘기특할 기’를 쓴 것을 보면 이름을 지어 준 한학자가 보기에 게일이 꽤 기특했나 봅니다.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들도 게일이 무척 마음에 들었던 것 같습니다. 이들은 게일이 북장로회 선교사가 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고, 그 결과 독립 선교사였던 게일은 1891년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892년에는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헤리엇 헤론과 결혼했습니다. 헤리엇은 의료 선교사 존 헤론의 부인이었는데, 존 헤론이 과로 끝에 전염성 이질로 사망한 후에도 조선에 남아 선교를 이어가다 게일과 재혼하였습니다. 소속도 생기고 아내도 생기고 겹경사였다고 해야겠습니다. 게일은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사역했습니다. 서울, 해주, 소래, 부산, 원산, 일본 요코하마, 원산 등에서 활동하던 그는 1899년 서울에 정착했고, 이후에는 주로 서울에서 활동하였습니다. 신학을 한국에서 거의 독학으로 공부했는데, 1897년 5월 13일 미국 인디애나주 뉴 알버니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독학으로 신학을 공부해서 미국 장로교 목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을 미루어 보면 이 사람의 머리가 엄청 좋았던 것 같습니다. 게일은 실제로 학술적인 선교사였습니다. 조선의 언어‧역사‧문화 등 다양한 방면에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게일은 문서 사역자로서 탁월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40권이 넘는 번역서와 단행본, 400여 편의 다양한 기고문들이 남아 있는데, 이것들은 그가 얼마나 열심히 한국의 문화를 세계에 알리고 서양의 문화를 한국에 알렸는지를 보여 줍니다. 게일은 한국의 문화를 매우 존중하고 아꼈습니다. 1894년 그가 번역한 『천로역정』은 한국 근대의 첫 번역 소설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책의 삽화는 풍속 화가인 기산 김준근이 그렸는데요. 등장인물들이 다들 조선인으로 표현되어 있어 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예수님, 선녀처럼 보이는 천사 같은 그림들은 한국 기독교 미술 토착화의 출발점이 되기도 합니다. 한문에도 능통했던 게일은 성서 번역 위원으로 30년가량 활동하면서 신(God)의 번역어를 ‘하나님’으로 주장했습니다. 언더우드가 주장한 ‘천주’와 게일과 마펫이 주장한 ‘하나님’ 사이에서 꽤 오래 논쟁이 진행되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언더우드도 ‘하나님’에 동의를 하면서 지금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옆 나라 일본에서는 아직도 신(God)의 번역을 그냥 ‘카미사마’(かみさま, ‘신님’)로 하고 있는 것을 보면, 한국의 신 이름은 현지의 문화에 맞게 정말 잘 번역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게일은 여러모로 한국 기독교에 큰 영향을 미친 선교사입니다. 게일의 ‘서울 지도’ 오늘 소개해 드리는 ‘서울 지도’는 게일이 1902년에 영국 왕실이 지원하는 왕립아시아학회(Royal Asiatic Society)의 기관지인 「트랜잭션즈」(Transactions)에 처음 소개한 서울 지도입니다. 지난 글에서 한번 기증자로 소개해 드렸던 홍승표‧홍이표 목사 형제가 기증해 주셨습니다. 두 분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 지도는 1900년에서 1902년 사이 서울의 모습을 반영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지도에 등장하는 통신원, 철도원, 헌병부 등이 모두 1900년에 설치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측량과 같은 부분이 조금 아쉬운 지도입니다. 측량 부분은 1830년대에 김정호가 그렸던 수선전도와 유사합니다. 서울이 좌우 대칭으로 아주 반듯해 보이는데, 실제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서대문이 너무 북쪽으로 올라가 있다든가 하는 왜곡이 있습니다. 1899년부터 1900년에 걸쳐 조선 왕실이 서울의 측량 사업을 했는데, 그 측량 결과가 더 잘 반영된 지도였다면 좋았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이 지도는 지리적으로 정확한 위치를 표시하기 위한 지도라기보다는 서양에 조선의 도성 모습을 대략 알리기 위한 약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전통적인 도성 지도가 한문 밖에 기입되어 있지 않았던 반면, 이 지도는 한글로 병기가 되어 있어 다양한 사람들이 지도를 볼 수 있게 했다는 드높은 의의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덕수궁인 경운궁 인근에 례배당(현 정동제일교회), 이화학당, 배재학당 등 북감리회 서울 선교 스테이션 자리가 표시되어 있고, 숭례문 안쪽으로도 례배당(현 상동교회)이 표시되어 있어 기독교 선교와 근대화가 진행되던 당시의 모습을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다른 박물관의 학예사들이 방문한 적이 있는데, 이 지도를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들여다보며 대화를 나누는 것을 들었습니다. “어머, 어머, 저기 명례방 찾았어!” 1900년대 초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이 많은 분들에게는 매우 귀중한 자료입니다. 이 글은 (사)기독교윤리실천운동의 <좋은나무>에 게시된 글을 전재한 것입니다. 전재 글 바로가기 ☞ 게일 선교사의 서울 지도(손승호) - 기독교윤리실천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