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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 아름다웠던 순간들,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2025년 8월 12일,
우리 곁에 늘 함께 해 온 기독교의 이야기가
여러분 앞에 펼쳐집니다.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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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가 한국에 돌아온 ssul (안교성)
갤러리선교가 ‘가라’라는 동사로 시작되었다면, 어떤 동사로 끝이 나야 할까? 근현대 서구의 선교운동은 세월이 흐르면서 두 가지 질문에 직면했다. 첫째는 ‘언제 돌아가는가’라는 질문이다. 그런데 초창기 선교사는 대개 평생 사역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돌아가는 것보다는 머무는 것에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선교사가 오래 머물다 보니, 현지교회가 선교사 철수를 요구하는 ‘선교 유예’(missionary moratorium) 주장까지 나왔다. 물론 선교사가 필요없다는 이 ‘선교 유예’의 입장은 대세의 흐름이 되지는 않았다. 둘째는 선교사를 ‘계속 보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선교지 상황이 달라지면서, 선교사나 선교사역에 대한 요구도 달라졌다. 20세기 전반에는 ‘새로운 선교사’라는 주제가 대두되었다. 새로운 선교사는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모습을 보였고, 현지교회의 선교 전문성을 심화하거나 아예 새로운 분야를 여는 마중물의 역할을 했다. 한국에서도 1920년대부터 선교사 철수나 새로운 선교사 등의 주제가 거론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한 선교사는 이런 새로운 변화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준비하지 않다가,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일제에 의해 갑자기 추방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해방 후 한국에 선교사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제국주의의 종말을 가져온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세계적으로는 선교가 제국주의 배경에서 이뤄졌다는 이유로 선교사의 귀환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는 선교지에 대한 애착도 컸고 선교 사역도 갑작스럽게 중단되었기에, 기존 선교사가 속속 귀환했고, 새로운 선교사도 계속 들어왔다. 선교사는 해방 후 다양한 역할을 맡았다. 국가적으로는 통역과 고문 등으로 국가 재건에 기여했다. 더구나 정부수립 직후 6.25전쟁이 벌어지자, 전쟁 구호와 전후 복구에 힘썼고, 심지어 참전하여 국가 수호에 기여했다. 교회적으로는 교회 재건에 앞장섰다. 또한 교회, 병원, 학교 등 전통 영역의 범위를 넘어, 문맹퇴치, 가정 사역, 여성 사역, 아동 선교, 방송 선교 등 새로운 영역에 나섰다. 한국교회가 복음을 내면화하도록 성경연구, 묵상 운동도 소개했다. 학원 선교를 도입한 결과, 전도훈련운동이 전국복음화운동의 흐름 속에서 시작됐고, 교회에서는 제자훈련 프로그램이 시작됐다. 이런 훈련들은 한국교회가 세계선교에 본격적으로 나서는 일에도 도움을 주었다. 사회적으로는 한국교회의 산업화와 민주화에 기여했다. 산업전도에서 산업선교로 진화한 노동 선교에 선두적인 역할을 했고, 도시빈민 문제 등 산업화의 어두운 면에 눈길을 돌리게 했고, 무엇보다 인권과 민주주의 발전 과정에서 고난받는 한국인의 친구요 증인이요 함께 고난받는 자가 되었으며 때로는 이로 인해 추방도 당했다. 흥미롭게도 최근에는 서구인이 아니라 해외 동포가 선교사로 한국에 오고 있다. 한국인은 국내외에서 선교 열정을 지닌 민족으로 이제는 오히려 조국에도 선교사로 돌아오고 있다. 시대에 따라 선교사 유형은 달라지지만, 계속되는 것이 있다. 바로 선교사가 현지교회의 일원이 되어, 세계 교회가 하나라는 교회일치운동의 상징이 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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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림]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개관식
갤러리 -
선교사가 한국을 떠난 ssul (안교성)
갤러리 19세기말과 20세기에 선교사가 선교지로 떠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선교지로 떠나는 장도의 길에 나서는 것은 비장한 일이었고, 적지 않은 경우 영원한 이별을 의미했다. 그래서 당시 선교사는 대개 평생 사역을 염두에 두고 떠났다. 만일 젊어서 돌아오면 가족 친지들과 재회할 수 있었지만, 안식년으로 인한 귀국이 아닌 경우라면 다양한 이유(진로 변경, 갈등, 질병, 스캔들 등)로 인한 중도탈락이기에, 재회가 즐겁거나 순조롭지 못한 때도 있었다. 더구나 은퇴하여 귀국하면, 막상 만나야 할 사람들이 이미 세상을 떠났거나 혹은 선교사를 모르는 사람들만 남아 있을 때도 있었다. 그렇다면 평생 사역을 하고자 선교지에 부임했던 선교사는 왜 한국을 떠나게 되었을까? 대표적인 이유 중 하나는 선교사 자신이나 가족의 죽음이었다. 그런데 당시 본국으로 시신을 운구하기 어려운 탓에, 사망한 이는 대개 선교지에 묻히게 되었다. 그래서 아시아 여러 곳에 외국인묘지가 있었다. 한국 양화진의 묘원은 의료선교사 헤론의 사망으로 인해 시작되었기에,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가족이 사망한 선교사, 또는 사망한 선교사의 유족들은 선교지에 남거나 귀국했다. 선교지에 남은 선교사나 유족은 현지에서 재혼을 하기도 했는데, 사무엘 마펫(S. A. Moffet)이 두 번 결혼한 이야기나 게일(J. S. Gale)이 첫번째 순직자 헤론(J. W. Heron)의 아내 깁슨(H. E. Gibson)과 결혼한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자신이 사망한 경우, 선교사는 육체적으로는 선교지에 남았지만 사역은 중단되었다. 그러나 선교사의 죽음이 더 많은 선교사를 한국으로 불러온 경우가 많았다. 호주 선교사 데이비스(J. H. Davies), 캐나다 선교사 매켄지(W. J. McKenzie), 미국 선교사 켄드릭(R. R. Kendrick) 등이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켄드릭의 묘비에는 “If I had a thousand lives to give, Korea should have them all”(만일 내게 천개의 생명이 있다면, 모두 한국을 위해 바치리라).”고 적혀 있다. 선교지에서 사망하거나 조기에 철수한 선교사들 중에는 유독 의료선교사가 많았다. 열악한 환경에서의 의료선교 자체도 어려운 일이었지만, 질병에 노출되고 과로가 이어지면서 신앙과 인류애에도 불구하고 요절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초창기에 의료선교는 목숨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이었다. 예외적으로 외국에서 사망한 후 시신이 선교지로 돌아오거나 살아서 한국을 재방문했다가 사망하는 경우도 있다. 오늘날 선교사를 선교지에 재매장하는 것은 그 취지는 이해하나 사실상 불가능하여 재고해야 하기에, 인터넷 등 가상공간의 추모가 현실적일 것이다. 특히 한국을 사랑하려다가 정치사회적인 이유로 추방된 경우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대한제국의 멸망을 막으려다 추방된 헐버트(H. B. Hulbert), 3.1운동의 실상을 폭로한 스코필드(F. W. Schofield), 그리고 해방 후 군사정권기에 독재에 반대한 오글(G. E. Ogle)이 있다. 헐버트는 한국 재방문 직후 사망하여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묻혔고, 스코필드는 한국에 재입국하여 오랜 기간 사역하다가 사망하여 국립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묻혔다. 오글은 정치적 민주화 성취 이후에 한국에 초청받았고, 사망 후 아내가 그가 생전 한국을 잊지 못했다는 편지를 보냈다. 헐버트의 비석에는 “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in Westminster Abbey.”(나는 웨스트민스터사원보다도 한국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라고 적혀 있다. 선교사들이 사랑했던 한국을 우리는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나가서 사역하는 선교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선교140주년을 맞아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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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가 사방을 돌아다닌 ssul : 가라 땅끝까지, 걸어서, 말 타고, 가마 타고, 배 타고, 자전거 타고, 기차 타고, 자동차 타고 (안교성)
갤러리선교는 어떤 동사로 묘사할 수 있을까? 가장 대표적인 것은 ‘가라’(go)일 것이다. 예수님의 지상명령으로 알려진 마태복음 28장 18-20절의 경우도, 사실 문법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제자로 삼아’지만, 독자에게 가장 인상적인 것은 ‘너희는 가서’이다. 따라서 선교는 무엇보다 ‘가는 일’로 알려졌다. 근현대서구선교운동의 역사를 보면, 선교사들은 본향을 떠나 머나먼 선교지로 갈 때, 대개 배를 탔다. 그래서 선교사는 처음 도착한 개항지(혹은 수도)에 현지 선교부를 설립했다. 자연스럽게 개항지를 중심으로 사역이 이뤄졌다. 이런 선교를 개항지 선교 혹은 해안선 선교(coastland mission)라고 한다. 그러나 자칫 이런 형태가 고착될 수 있다. 그래서 선교지 곳곳으로 찾아 나서는 내지 선교(inland mission)가 대두됐다. 오늘날은 지리적 오지 개념을 넘어 인종적 오지 개념에 따라 미전도종족 선교(unevangelized people mission)가 발달했다. 한국에 온 선교사들도 다양한 교통수단을 사용하여 한국 방방곡곡을 찾아 나섰다. 최초에는 주로 개인별로 선교지 탐방 여행이 이뤄졌고, 곧이어 각 지역의 중요 거점에 선교지부를 개설했다. 역사 발전에 따라 교통수단도 발전했는데, 선교사들은 당대의 교통수단도 이용했지만, 새로운 교통수단을 앞장서서 활용했다. 한국에서는 19세기 말까지 대부분 사람은 걸었고, 신분 높은 사람은 말이나 가마를 탔다. 선교사들도 여행을 갈 때, 걷거나 말과 가마를 탔다. 하운(河運, 강을 통한 이동)이 가능한 지역은 배를 탔다. 배는 꽤 유용한 이동수단이었다. 천주교의 경우이지만 남양주에 있는 정약용의 집과 광주에 있는 천진암이 육로로 가면 멀지만, 배를 이용하면 바로 강 건너이다. 이동수단과 지역의 흥망은 깊이 연관이 있어 하운이 쇠퇴하면서 지역도 쇠퇴하는데, 대표적으로 여주를 들 수 있다. 아무튼 선교사들은 배를 즐겨 이용했다. 지금도 양수리에서 양평 쪽으로 가다 보면, 선교사가 배를 이용해 개척한 교회들이 많다. 휴양지도 배로 접근이 편리한 한강 변이나 황해도 송천(솔내), 강원도 원산, 해방 후 충청도 대천 등에 만들었다. 언더우드 가문은 배 애호가로 유명한데, 원두우(H. G. Underwood)의 아들 원한경(H. H. Underwood)은 한국 선박 관련 책을 썼고, 손자 원일한(H. G. Underwood)은 6.25전쟁 중 행주 도하작전에 기여했다. 19세기 말부터 새로운 교통수단이 차례로 도입되기 시작했다. 서재필, 윤치호 등이 자전거를 탔는데, 선교사 중에서도 평양에서 사역하던 리(Graham Lee)나 웰즈(James H. Wells)는 자전거로 평양과 서울을 오갔다. 선교사는 자전거를 타다가 위험한 순간을 맞은 경우가 많았다. 철도는 말을 대신하는 철마라는 이름으로 대표적인 교통수단으로 떠올랐다. 경부선 개설로 공주 대신 대전이, 경원선 개설로 원주가, 경의선 개설로 의주와 선천이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고, 자연스럽게 선교지부도 신설되거나 이동했다. 오늘날 교통의 총아인 자동차 시대가 돌입하자, 선교사도 자동차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끔찍한 사고도 났다.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 벨(Eugene Bell)이 서울에서 광주로 자동차를 타고 귀가하다가 병점의 철도 건널목에서 충돌사고가 나서, 부인 마거렛(Margaret W. B. Bell)과 동료 선교사 크레인(Paul S. Crane)이 현장에서 즉사했다. 오늘날은 물리적인 이동도 중요하지만, 이동통신을 통한 이동도 중요하다. 앞으로 선교사들은 이동통신을 통해 세계 곳곳으로 나아갈 것이다. 선교 140주년을 맞아, 선교사와 교통수단을 생각해 보는 것도 할 만한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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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 선교 시작 ssul : 한국기독교 선교140주년? 141주년? 193주년? 대체 어느 것이 맞나요? (안교성)
갤러리올해는 선교 14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많은데, 관련 연도부터 논란이다. 첫 번째 칼럼이니, 이 문제부터 정리해 보자. 사실 선교 기원에 대한 논의는 오래됐다. 크게 1884년 설, 1885년 설, 1832년 설 등이 있다. 가장 먼저 정착된 것은 1884년 설이다. 초창기부터 선교부들은 1884년을 기준으로 삼았다. 이해 9월 첫 번째 거주 선교사 알렌(H.N. Allen, 장로회)이 입국했다. 그는 갑신정변 때 민영익을 극적으로 치료하여 선교의 문을 열었다. 그런데 이에 앞선 6월에 한국선교를 준비하러 매클레이(R. S. Maclay, 감리회)가 방문했다. 그는 중국선교사로 출발해서 일본선교사가 된 인물로, 일본선교 개척과 한국선교 개척에 기여했다. 따라서 1884년 설은 일찍 정착되었지만, 매클레이와 알렌 중 누가 먼저냐가 문제가 되었다. 두 번째 대두된 것은 1885년 설이다. 매클레이는 단기 방문에 그쳤고 알렌은 얼마 후 외교관으로 변신했다. 한국교회의 기원으로 이어지는 교회 사역을 한 목회자 선교사는 1885년에 입국했다. 다행히 아펜젤러(H.G. Appenzeller, 감리회)와 언더우드(H.G. Underwood, 장로회)는 부활절에 동시 입국하여 누가 먼저냐는 시비는 없었다. (* 흥미롭게도 이 둘은 이름의 약자도 똑같다.) 감리회 선교부는 위험을 대비하여 한국 선교사 일행을 둘로 나눠 보냈고, 그 결과 같은 해 5월에 의료와 교육 선교에 족적을 남긴 스크랜턴 가족이 2차로 입국했다. 여하튼 교회 사역에 관심이 큰 한국교회는 당연히 1885년을 선호했다. 그 결과 한국기독교 100주년 기념행사도 절충안으로 1984~1985년 2년에 걸쳐 진행되었다. 세 번째는 1832년 설이다. 한국을 최초로 방문한 선교사인 귀츨라프(K.F.A. Guetzlaff, 초교파, 루터파)가 최근 주목받고 있다. 그는 약 한 달간의 서해안 섬 방문 중 성경을 전하고 약을 나눠주고 주기도문을 번역했다. 그러다 보니 최초 선교사가 루터교라는 주장도 대두되었으나, 그는 초교파 선교회 소속이었다가 독립선교사가 되었기에, 이 주장은 학계의 논의가 필요하다. 이른 시기 한국을 방문한 선교사로는 평양의 대동강변에서 1866년 순직한 토마스(R.J. Thomas, 초교파, 회중교회 출신)도 빼놓을 수 없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한국선교의 개시 연도를 보면, 입국한 장기 선교사를 중심으로 하면 1884년 알렌 설이 유력하고, 방문한 단기 선교사를 중심으로 하면 1832년 귀츨라프 설이 유력하다. 이와 더불어 만주에서 성경번역에 참여한 신앙공동체 설(1879년), 의주 신앙공동체 설(연대 확정 어려움), 소래교회 설(연대 확정 어려우나 대략 1883~1885년)이 있으나, 이것은 선교 기원이 아니라 한국교회 기원과 관련된 것이기에, 범주가 다르다. 좀 더 범위를 넓혀 한국기독교의 기원을 살펴보면, 1832년 이전에도 역사적 확실성은 높지 않지만 다양한 기독교 전래 역사가 있었다. 삼한 시대 김수로왕 치세 당시 사도 도마 전승을 따르는 인도교회 전통과 관련된 인도 공주의 입국, 신라 시대 경교의 전래설, 고려 시대 충렬왕의 왕비인 몽골 공주와 정동행성(征東行省)의 평장정사(平章政事)를 통한 경교의 전래, 조선 시대 소현세자를 따라 입국한 명나라 가톨릭 신자 나인, 정조 재위 당시 실학파 학자 출신의 자생적 신앙인 대두, 조선 시대 주문모 등 중국 가톨릭 선교사의 내한 등이 모두 그런 사례이다. 장차 이런 모든 지점을 망라한 논의가 요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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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캠페인] 기증릴레이 하이라이트(15인)
갤러리신앙이 아름다웠던 순간들,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입니다. 2024.05.22. - 2024.07.24. 2025.02.05. - 2025.03.05. 2024년 5월부터 2025년 3월까지 진행된 《함께 캠페인》 기증릴레이! 15인의 기독교계 인사들이 교단을 초월해 서로를 지목하며 기증하는 캠페인을 통해 진정한 기독교 ‘연합’의 가치를 전했습니다. 한국 기독교의 역사와 문화가 발전할 수 있도록 더 다양한 구성원들과 함께 하겠습니다.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유튜브 : [함께캠페인] 기증릴레이 하이라이트(15인) ☜ 클릭하시면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 문의 : 한국기독교역사문화재단 ○ 전 화: 02-356-8414~6 ○ 이메일: info@kcmuseum.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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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신앙이 아름다웠던 순간들,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입니다. 본 영상은 2024년 하반기에 시민분들의 사연을 받아 재구성 및 편집 되었습니다. 신앙의 경험과 기억을 기록하여 다양한 기독교의 문화를 수집하는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이 되겠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분들의 소중한 이야기와 신앙의 아름다웠던 순간들과 함께 하겠습니다.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유튜브 : [사연소개]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장소 ☜ 클릭하시면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 문 의 : 한국기독교역사문화재단 ○ 전 화 : 02-356-8416 ○ 이메일 : info@kcmuseum.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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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소개]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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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캠페인] 기증릴레이 영상 15 - 최일도 목사(다일복지재단)
갤러리신앙이 아름다웠던 순간들,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입니다. 2025.02.05. - 2025.03.05.(5주간) 매주 수요일 오후 4시 업로드 되는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의 《함께 캠페인》 기증릴레이 시즌2 ! 열 다섯번째 주자는 다일복지재단 최일도 목사님입니다. 이번 《함께 캠페인》은 한국기독교 역사문화의 전시·교육·연구를 수행하기 위하여, 올해 하반기 개관하는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의 ‘기증 및 후원’ 캠페인입니다. 기독교계 인사들이 교단을 초월하여 서로를 지목하는 진정한 기독교 ‘연합’의 가치를 전합니다.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유튜브 : [함께캠페인] 기증릴레이 영상 15 - 최일도 목사(다일복지재단) ☜ 클릭하시면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 문의 : 한국기독교역사문화재단 ○ 전 화: 02-356-8416 ○ 이메일: info@kcmuseum.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