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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너머의 벽 Wall Beyond Wall
사랑과 평화의 마음으로 막힌 벽을 넘고자 했던 한국 기독교의 역사적 순간들(3): 1924년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창설의 순간
1924년 9월 24일 새문안교회에서 한국교회, 선교부, 기독교 기관 등이 모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당시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를 결성했다. 이로써 한국 교회일치운동이 본 궤도에 들어섰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선교사 입국 이래 진행되어 온 국내 교회일치운동을 집대성하는 한편, 국제선교협의회의 일원이 됨으로써 세계 교회일치운동과도 관계를 맺었다.
교회일치운동은 영어로 에큐메니칼운동이라고 하는데, ‘에큐메니칼’(ecumenical)이란 단어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인간이 사는 ‘온 세상’을 의미하고, 다른 하나는 온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를 의미한다. 그래서 교회일치운동은 세상 사람들이 하나 되는 것과 다양한 교파가 하나 되는 것을 추구한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말한다(요 3:16). 이에 따라, 교회일치운동은 하나님께서 교회와 세상을 사랑하시는 일에 동참했다. 한마디로 교회일치운동은 하나님의 ‘교회 사랑’과 ‘세상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한국교회는 물론이고 한국 사회에 대해 여러모로 사랑을 나타냈다. 특히 기억해야 할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일찍부터 한국 사회의 약자에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이고, 또 하나는 대한민국을 6.25전쟁의 위기에서 구해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다.
먼저 1932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당시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는 ‘사회신조 초안’을 발표하면서 서문과 더불어 12개의 행동강령을 소개하는 가운데, 제11조에 “최저임금법, 소작법, 사회보험법의 제정”을 언급한 바 있다. 이미 백 년 전쯤 한국 사회의 경제적 벽을 넘는 최소한의 장치라고 할 수 있는 최저임금이 다뤄졌다. 이어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1973년 ‘인권선언’에서도 노동자의 인권 항목에서 “최저임금제도와 사회보장제도를 확립”할 것에 대해 언급했다. 이런 기본적인 문제가 오늘날에도 논란이 이어지는 것을 보면, 아쉬울 따름이다.
한편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인하여 6.25전쟁이 발발했다. 전쟁 발발 직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당시 한국기독교연합회)는 미국 교회, 선교 단체, 국제선교협의회 미국 사무국 등 미국 교계에 긴급 타전하여 국가 비상사태를 알렸다. 한국의 전쟁 위기는 즉각 미국 교계의 관심을 받았고, 미국 교계를 필두로 한 전 세계 교회가 전쟁 구호와 전후 복구에 적극 나섰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전쟁 구호와 전후 복구 사역의 구심점이 되었다. 또한 전쟁 발발 직후 유엔(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가 6.25전쟁을 의제로 다뤘는데, 마침 휴가 중인 미국 대표를 대신하여 미국 부대표요 교회일치운동 운동가였던 인물이 주도하여 유엔군 참전 결의를 이끌어냈다.
얼마 뒤인 7월에 세계교회협의회 중앙위원회는 캐나다 토론토 회의에서 ‘한국 상황과 세계 질서’라는 성명서를 통해 북한의 남침을 규탄하고 이를 퇴치할 경찰 행위(방어적 군사행동)를 지지하는 한편 타협과 조정을 통한 해결책도 추천했다. 이때 세계교회협의회가 인도적 결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중립 입장을 견지하지 않고 반공적 결정을 했다고 비난받았다. 그러나 불과 1년 뒤인 1951년 6.25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가자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가 평화를 위해 휴전을 추진했는데, 세계교회협의회도 이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이번에는 용공 단체로 몰렸고, 이런 음모론은 오늘날도 회자된다. 이는 어처구니 없는 모함을 넘어 배은망덕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종전 이후 분단의 벽을 넘으려는 평화와 통일운동에 매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