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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의 순간들(6) :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여 오라

2025년 11월 12일

벽 너머의 벽 Wall Beyond Wall

사랑과 평화의 마음으로 막힌 벽을 넘고자 했던 한국 기독교의 역사적 순간들(6): 1988년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 기독교회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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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소원은, 가장 큰 소원은, 과연 무엇일까? 제목이 아예 ‘우리의 소원’이란 노래가 있다. 바로 통일에 대한 노래이다. 부자지간인 안석주, 안병원이 작사하고 작곡한 동요로, 1947년 서울중앙방송국 어린이시간에 발표된 곡이다. 귀엽고 예쁘기만 한 동요인데, 이 동요가 노래하는 소원은 아직도 이뤄지지 않았고, 그 소원을 이루려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그래서 동요를 부르는데, 비장감이 든다. 그리 길지 않은 가사라서, 전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을 이루자, 이 겨레 살리는 통일, 이 나라 살리는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여 오라.”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핵심을 알차게 담은 ‘동요 통일론’이다. (동요통일론: 어린이들이 부르는 동요를 통해 통일의 염원을 표현하고 미래 세대에게 통일 인식을 함양하려는 활동이나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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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적인 해방은 민족의 소원을 반만 들어줬다. 독립했지만, 독립을 잃기 전의 모습은 두 동강이 났다. 그때부터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다. 하나였다가 둘로 나뉘었기에, 다시 하나가 되려는 통일을 가로막는 분단의 벽을 넘는 일은 따지고 말고 할 게 없다. 이 일은 소원이라기보다 민족의 명령이다.

분단을 넘어 통일로 나가려는 노력은 분단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길은 가시밭길이었다. 정부 수립 이후 통일의 우선적인 당사자로 나선 정부는 통일 문제에 대해 소극적인 경우가 많으면서도 민간 참여를 막고 독점하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최근까지 7개의 주요남북합의서와 기타 성명서 등을 냈다. 주요남북합의서로는 7.4남북공동성명(1972),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 1991),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1992), 6.15남북공동선언(2000),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10.4선언, 2007),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선언(판문점선언, 2018), 평양공동선언(2018) 등이 있다. 그 중에서 첫번째 합의서인 7.4남북공동성명은 통일 3대 원칙인 ‘자주, 평화, 민족적 대단결’을 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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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교회도 다양한 의견을 냈다. 대표적인 것이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88선언)이다. 1988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한국교회의 수년 간의 통일을 위한 노력과 생각을 집대성하여 발표한 것이다. 이것은 기존의 통일 3대 원칙을 존중하면서도, 2가지 원칙을 추가했다. 곧 ‘인도주의, 민족 구성원 전체의 민주적인 참여 곧 민간 참여’이다. 인도주의와 민간 참여는 이후 정부의 통일 정책에 반영되었다.


88선언은 기독교적 통일론의 관점에서 남북한 정부에 여러 제안을 건넸다. 분단으로 인한 상처의 치유, 분단극복을 위한 국민의 참여 증진, 사상.이념.제도를 초월한 민족적 대단결, 남북한 긴장완화와 평화증진, 민족 자주성의 실현 등을 위한 구체적인 제안들이었다. 이것은 국내외에서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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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막상 국내에서는 분단 문제에 대해 소극적이었음을 회개하는 것에 대해서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반응도 이해가 되지만, 분단 극복과 통일 실현은 대속적 고난이 없이는 이뤄지기 어려운 일이다.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이 중요하다. 곧 죄인을 위해 의인이 죽는 십자가 정신이 필요하다. 세상의 용서 개념은 잘못한 사람이 용서를 비는 것이다. 이것은 이해는 쉽지만, 실제로 이뤄지기는 어렵다. 다른 말로 ‘사법적 정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기독교적 용서 개념은 잘못의 피해를 입은 사람이 용서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해는 어렵지만, 실제로 이뤄지기는 오히려 쉽다. 다른 말로 요즘 각광받기 시작한 ‘회복적 정의’라고 할 수 있다.


부디 이런 방식의 화해가 기독교인부터 시작하여 널리 퍼지기를 바란다. 그래서 통일이 조금이라도 빨리 오기를, 통일이 늦어진다면 평화라도 정착되기를. 이뤄지기 어려운 소망이기에, 순수한 소년소녀의 마음으로 다시 불러본다. ‘통일이여 오라.’ 남북은 원수가 되기 전에는 형제였다.